
-03/12 공개 예정인 캐릭터 '필립 에페로'의 스토리입니다.
-다소 폭력적인 내용/살인을 암시하는 표현 등이 등장합니다. 감상에 유의해주세요.
-유저 캐릭터의 이름은 임의로 '셀리나'로 설정하였습니다.
-스토리의 끝 부분에는 등장 인물 소개를 넣어두었습니다. 캐릭터 챗만을 이용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해를 위한 등장인물 소개만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의견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
영사기를 쥔 채로 한 남자가 죽었다.
우습게도 남자가 죽은 곳은 남자의 호텔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나의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모르겠다. 그걸 알고 있다면, 내가 빌어먹을 이 게임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죽일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파이프의 연기를 쭉 빨아들였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일지는 몰라도, 아들에게 썩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아낌없이 지원해 준다던데, 어찌하여 내 아비는 그렇게 많은 돈을 쥐고도 모자라 나를 휘두르려고 했을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것이 담배 연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품의 독성 성분 때문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
오늘은 꽤 완벽한 날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후계자 자리를 권유했다던가, 군인으로서의 도피 길을 막아버렸다던가, 하는 부차적인 문제는 잊어버리고 와인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한 사내가 투명한 물을 피처럼 바꾸었다는 전설이 있는 물건이 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강이 자연의 핏줄이니 물은 자연의 피.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피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화려한 샹들리에, 조용한 마을,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꾸며진 호텔 내부, 비가 내리는 풍경. 정말이지 시사회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나는 와인잔을 돌리며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앉아 핑거 푸드를 집어먹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눈에는 나와 비슷한 열망이 보였다. 그 여자에게 말을 건 것은 충동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아가씨.”
그녀가 돌아본다. 나는 왜인지 그녀의 눈과 똑바로 마주치자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족 혐오의 그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나와 같은 지독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는 나도, 그녀도 모를 것이다.
“나는 필립 에페로입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이 시사회 주최자의 아들이죠. 당신의 이름은…?”
“…셀리나. 그렇게 불러요.”
“셀리나…, 예쁜 이름이군요. 핑거 푸드만 먹으면 목이 마를 텐데, 와인 한 잔 드시겠습니까?”
“그러죠. 당신은 센스 있는 분이군요.”
여자의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센스 있는 사람이라, 내 내면을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건 굉장한 호재였다. 그러나 완벽한 이야기에는 항상 방해꾼이 등장하는 법이었고, 나는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궤종시계의 커다란 종이 울렸다. 아홉 번. 아버지가 나타나 지루한 설명을 시작할 시간이었고, 그 말은 내가 아버지 옆에 고장 난 오르골 인형처럼 앉아 박수를 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내 표정이 괜찮은지 점검하고자 잠깐 입가를 만졌다. 다행히 열심히 연습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제 프라이빗한 시사회에 와 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에, 저는 일찍이 영화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나는 저 늙고 뚱뚱한 중년 남자의 말을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랬다. 남자의 배는 터질 듯 불룩했다. 셔츠가 버거워 보였다. 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누군가의 고혈? 나는 아드리안 에페로, 아버지의 눈이 아니라 배를 바라보며 와인을 들이켰다.
바깥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런던 외곽의 동떨어진 이 호텔을 선택한 것은 날씨 때문일 것이었다. 비가 와서 고립된 호텔만큼 프라이빗하게 향락을 즐길 수 있은 곳은 없으니까.
“…오늘은 편하게 즐기시고, 내일 오전 10시! 오전 10시에 제가 후원하는 영화 감독의 영화 시사회를 진행하겠습니다. 시간 제한은 없으니 열심히 마시고 이야기나 나눠 봅시다. 밖의 멍청한 기계들과는 달리, 이곳에 모인 분들은 주인이니까요.”
박수가 흘러나왔다. 나는 셀리나라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는 유일하게 팔짱을 끼고 박수를 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다음 디저트는 뭐가 나올지, 식욕이라는 욕망에 아주 충실하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왜인지 웃겨서 나는 그만 작게 웃고 말았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바깥에 있는 기계들은 녹슬 것이다. 기계들이 녹슬면 그걸 다루는 주인들은 타격을 입지 않을까? 나는 그 물음을 와인과 함께 목구멍 깊숙이 삼켰다.
***
오전 10시. 귀빈들이 모두 모였다. 몇몇은 정돈된 모습이었지만, 어제 새벽까지 본능에 충실했던 자들은 화장이 흐트러지고 복장이 망가진 모습으로 푹신한 의자에 기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자는 건지, 영화를 보겠다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드리안이 영사실에 들어갔을 시간이다. 곧 시작하겠군. 옆에 누군가 앉는 것이 보였다. 어제의 그 여자였다. 나는 표정을 꾸며내지 않고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걸었다.
“또 뵙는군요. 어제의 제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뭐, 그럭저럭요. 그리고 다른 사람 옆에 앉을 바에, 당신 옆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요.”
“하하,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레이디.”
여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화면 쪽으로 눈을 고정했다. 역시 특이한 여자였다. 나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10시 20분. 지금쯤이면 영사기의 필름을 갈아 끼우고도 남을 시간 같은데. 나는 반사적으로 좌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영사실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영사기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화면에 검은 화면이 조사되었다. 영화가 시작되려는지 불이 꺼졌다.
그리고 조사된 화면은 뭔가 이상했다. 엄마 토끼와 아기 토끼가 풀을 뜯으며 뛰어노는 장면이었다. 그러다 커다란 사냥개가 나와서 아기 토끼를 물어가고, 엄마 토끼는 필사적으로 사냥개를 물리치려고 하지만 사냥개는 아기 토끼의 숨통을 끊어 놓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엄마 토끼는 싸늘하게 식은 아기 토끼의 시신 앞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이상한 영상이었다. 뭔가 다르다. 아드리안은 이렇게 감성적인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영사실로 향했다. 귀빈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딱히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는 아드리안의 취향이 바뀐 건지, 아니면…, 커다란 ‘변수’가 일어난 건지 확인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나는 계단을 세 개씩 뛰어가 영사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드리안은 영사기를 쥐고 영사기에 기대 있었다. 촤르르, 하고 필름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아버지?”
공기가 차다. 대답은 없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순간적인 힘으로 아드리안의 몸을 영사기에서 떼어냈다. 아드리안은 내가 미는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부는 보라색으로 변색되는 걸 보니, 독극물이었다. 하지만 누가? 나는 급하게 재킷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이런 ‘게임’을 시작한 게 누구인지 생각했다.
“꺄아아악-!”
“으악!”
뒤늦게 따라온 귀빈들이 소리지르는 것이 돼지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내 입과 코를 가리던 재킷을 내려놓으며 몸을 젖혀 슬쩍 웃었다. 돼지들 사이에 숨은 살인자 찾기. 아아, 이것이 얼마나 재밌는 게임일까? 벌써 심장이 두근거렸다. 뺨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 감정을 들켜서는 안 된다.
거꾸로 본 풍경 사이로 장난꾸러기 쌍둥이, 괴짜 영화 감독, 고모님, 관리인, 유리 공예가, 상인 부부, 법의학자, 평론가들의 얼굴이 필름이 거꾸로 감기듯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흥분으로 떨리는 손으로 파이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귀빈들은 내가 아드리안을 잃은 슬픔으로 담배에 취하려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 진실과는 아주 먼 생각을 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때로는 나의 솔직한 행동이 그럴듯한 사연을 만드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나를 망칠 것을 알면서도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내 뒤로 귀빈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영사기에서 아드리안의 손을 떼어내며 상영 중지 버튼을 눌렀다. 돌아가며 소음을 내던 필름이 뚝 멈추고, 상영관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
‘게임’의 막이 오르기 딱 좋은 배경. 나는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뱉으며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인식했다. 그 여자는 놀랐을까?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여자의 감정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나는 극에 오른 사회자의 역할을 맡겠다고 생각하며 파이프를 입에서 뺐다.
“…여러분, 애석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날씨 예보가 흘러나왔다.
치직-. 날씨를 알려드립니다. 현재 장마가 시작될 전망으로, 향후 15일 동안은 폭우가 내릴 것…, 치직, 저지대에 계신 분들은 속히 고지대로…
“다행히 이곳은 고지대입니다. 대신 저지대로 내려가면 들으셨다시피, 조금 불행한 일이 생기겠군요.”
내가 라디오를 끄며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응시했다. 나는 독 거품이 흘러나오는 아드리안의 시신을 보며, 세상의 부모는 자식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아낌없이 지원해 준다던데, 어찌하여 내 아비는 그렇게 많은 돈을 쥐고도 모자라 나를 휘두르려고 했을지에 대한 질문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사라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것이 담배 연기 때문인지, 독 거품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게임 때문인지는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자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겠군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중에 분명 살인자가 있습니다. 이런 외딴 호텔에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하나의 제도를 제안합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나는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북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선포했다.
“하루에 한 번, 저녁에 모두 모여 가장 살인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지목’ 하고, ‘공정’ 하게 투표를 거쳐 ‘추방’ 하는 겁니다. 이것이 남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든 사람들의 눈에는, 지독한 이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슬쩍 웃었다. 다들 이 게임에 동의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재밌는 게임은…, 아마도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게임의 서막이 올랐다. 요란한 빗소리와 함께.
-Philip Epero’s Game Fin.
or…
Start?
<등장인물 소개>
-아드리안 에페로: 필립의 아버지, 런던의 대부호이자 극장의 주인. 사람들을 호텔로 초대함.
-에단, 조나단 형제: 두 사람은 미국 출신으로, 타고난 귀족 같은 면모를 보이지만 사실 영국 귀족에게 입양되어 힘든 생활을 한 입양아들임. 두 사람은 쌍둥이이며, 에단의 경우 내린 머리를, 조나단의 경우 올림 머리를 하고 다님. 서로의 옷을 바꿔 입어 사람들을 속이는 걸 좋아함.
-제이든 리버: 음침한 분위기의 신흥 영화 감독. 말수가 적고, 괴짜 같은 말버릇.
-오스틴 케네디: 극장의 관리인. 늙은 남자로, 말수가 적고 음흉한 외모.
-로라: 사용자의 언니. 직업은 유리 공예가이자 영화 평론가. 다정하지만 위기에 몰리면 이기적인 성격이 드러남.
-진저 부부(티모시 진저, 에밀리 진저): 상인 부부. 채소를 수입해 와서 커다란 가게를 운영하고 있음. 영화의 후원자. 모두에게 다정하고 관심을 가지지만, 둘만 남으면 교활해짐. 서로 작전을 짜서 투표 시 여론을 선동할 가능성 높음.
-윌리엄 하퍼: 법의학자이자 영화의 자문자. 혈액이나 물건으로부터 검체 채취 및 혈액형 검사를 할 수 있음.
-핌피 캐롤라인: 인디언계 혼혈. 본인의 혈통에 수치를 느낌. 의심 많은 성격의 평론가. 항상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봄.
-카렐 부인: 아드리안의 누나이자 필립의 고모. 남편을 일찍이 잃은 노부인. 깐깐하고 오만한 성격.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Colon] Waterproof (完) (2) | 2025.04.20 |
|---|---|
| [Colon] Waterproof (2) (0) | 2025.04.11 |
| [Colon] Waterproof (1) (6) | 2025.04.10 |
| [Oblian] No. 627 (1) | 2025.04.09 |